2021.09.16 09:25
욥기와 같은 내용을 두고 신정론(神正論, theodicy)1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 의인이 까닭모를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어디 계신가? 왜 의인의 고난을 참아 보시는가?' 질문하게 됩니다. 더욱이 정 반대로 악인이 형통하는 것, 혹은 악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서 '왜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는가? 어떻게 악인이 더 형통하는가?' 질문하게 됩니다. N. T. Wright 는 이런 질문에 대해 본회퍼가 한 말, 즉 인간의 타락은 '선악을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우선시한 데 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유한한 사람의 지식으로 선악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신묘막측하여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을 이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고 꼬집고 있습니다.2
결론은,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시 73:1).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경험과 이해가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보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생각과 행동을 깨끗하게 함으로 의인의 삶을 살려 했지만 종일 재앙을 당하고 자고 깰 때마다 징벌을 받는 것 같은 삶을 삽니다 (13-14절). 그러나 반대로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악인들과 오만한 자들은 평안과 재물의 복을 누리고, 심지어는 죽음조차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3-12절). 아삽은 거의 시험에 들어 실수할 뻔 했고, 잘못 말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릇된 가르침을 노래로 남길 뻔 했습니다 (2, 15절).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즉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마음에 깊은 깨우침을 얻습니다.3 오히려 악인들과 교만한 자들이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린 것들이 일장춘몽과 같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18-20절). 이 모든 악의 기원과 부조리에 대해 그것을 속속들이 이해하여 판단하고 심판하려 하기 보다는,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일임을 믿고 그분께 맡기며, 그분에게 귀속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20-24절). 하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이시며,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십니다 (사 55:8-9, 롬 11:32-26)
1. 신정론 의미 이해
신정론을 한자와 상응하는 영어 단어로 보면, 神正論 theodicy 와 神政論 theocracy가 있습니다. 전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후자는 부조리와 악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는가?' 질문하는 것에 대한 답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이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선하시며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다스리신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더 좁게 보면, 신약 전체가 로마 황제가 다스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다스리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특히 구약의 다니엘서나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고난과 핍박(이라는 '현상')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교회에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실재'로 보여주는 책들입니다. (참고로, 영어 theocracy는 theodicy의 맥락에서가 아니면, 보다 일반적으로 신정정치 형태와 양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지식 vs 선악을 아는 지식
N. T. Wright, Evil and the Justice of God, p.59
디히트리히 본회퍼는 인간의 원죄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우선시한 데 있다고 말했다. 창세기 3장에 나온 또 다른 알 수 없는 미스테리 중에 하나다. 즉 우리가 말하는 선악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악에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완전히 도덕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에게 경고이기도 하다. 지나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리 하셔야 한다, 저리 하시면 안 된다' 교조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Dietrich Bonhoeffer declared that the primal sin of humanity consisted in putting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before the knowledge of God. That is one of the further dark mysteries of Genesis 3: there must be some substantial continuity between what we mean by good and evil and what God means; otherwise we are in moral darkness indeed. But it serves as a warning to us not to pontificate with too much certainty about what God should and shouldn’t have done."
3. 종말론적 이해
17절 '저희 결국을 깨달았다' 하는 말에서, '결국'(아하릿, אַחֲרִית)에 해당하는 말을 70인경은 헬라어 'eschatos, ἔσχατος', 종말(론적인)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그분 앞에서 모든 것의 결국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결국/종말의 복이 욥의 예처럼 이 땅에서 실현될 수도 있고 (욥 42:12), 다른 많은 의인의 죽음처럼 이 땅에서는 이뤄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이뤄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적인 예, 계7:9).
부조리와 원인 모를 고난에 대해서는 구약에서도 이미 욥기나 이사야, 다니엘 등에서 답이 주어지고 있지만, 신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불평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고난을 짊어지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오셨고, 우리 종이 되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Dorothy Seymore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제한적인 존재로, 고난을 겪고, 슬픔과 죽음에 굴복하게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정직하시며 용기있게 스스로 문제해결책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어떻게 운용하시든, 지금껏 원칙을 지키며 공정한 게임을 하고 계시다. 자신이 직접 짊어지신 게 아니면, 결코 사람에게 징수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 경험을 몸소 겪으셨다. 사소한 가족 문제부터 쥐가나도록 힘들게 일하고, 돈이 없어 고통과 창피와 패배와 절망과 죽음이라는 최악의 공포를 겪으셨다. 그분은 사람이셨을 때, 사람으로 사셨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수치스럽게 죽으셨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다."
“For whatever reason God chose to make man as he is— limited and suffering and subject to sorrows and death—He had the honesty and the courage to take His own medicine. Whatever game He is playing with His creation, He has kept His own rules and played fair. He can exact nothing from man that He has not exacted from Himself. He has Himself gone through the whole of human experience, from the trivial irritations of family life and the cramping restrictions of hard work and lack of money to the worst horrors of pain and humiliation, defeat, despair and death. When He was a man, He played the man. He was born in poverty and died in disgrace and thought it well worthwhile.”
(If God Is Good: Faith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Evil, by Randy Alcorn, p. 259)
4. 흥미로운 점은 초반부에서는 악인과 선을 행하려는 자신(과 같은 의인들)을 비교했다면,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과 멀리하는 사람들로 비교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