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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바른 것인가?’ 하는 질문은 공동체 크기의 수준과 주어진 상황, 혹은 문화 등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기존의 세계 무역 질서에 따르면 달러 샵/천냥마트 등에서 값에 물건을 사오는 것은 지혜롭고 바른 행동입니다. 그러나 약육강식 세계적 자본의 횡포에 맞서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한방울도 내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면, 그들의 노동력이 제 값을 받지 못해서 혹은 착취당한 결과로 값싼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해 마음에 부담을 갖고 부당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죄악시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강국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는 환경과 인권 문제에 신경쓰지만, 값에 사오는 것에만 관심 있을 뿐, 다른 나라에는 환경 파괴적인 산업과 노동 착취를 떠넘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커피 생산과 소비 문제를 보면, 국제 시장 원리에 따라 계속 값을 생산지에 강요하게 되면, 생존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산자들이 일하게 되고, 이익 극대화를 위해 비환경친화적인 생산 방식을 강요받게 됩니다. 훨씬 많은 수확량을 내는 볕에 키운 커피보다 전통적으로 그늘에서 키운 커피가 훨씬  환경친화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햇볕에 키운 커피 잔을 마시기 위해 140 리터의 물이 생산부터 소비 과정에 들어가고, 살충제 환경을 해치는 요소들이 훨씬 많고, 결과 더욱 착취적인 무역 거래 구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직거래 등을 통해 생산자에게 높은 가격을 주고 커피를 구입하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장기적으로 결국 생산 단가를 너무 높여 구매 수요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세계 정치 경제 차원의 새로운 상생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거창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선교한다고 하는 우리가 환경/생태신학이나 이런 단순한 경제적인 사실조차 외면하고, 여전히 제국주의적인 경제 선점의 결과에 편승하여 선심 쓰듯 물질을 나누며 선교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느 수준까지, 어느 정도 크기의 공동체와 상황에까지 복됨’ 특권을 누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모든 민족, 피조 세계로 확대해야 하는 것이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중요한 다림줄 혹은 잣대로 다윗의 길’ 여로보암의 죄’ 있습니다. 먼저, 열왕기서에서는 (예를 들어, 역대기가 남왕국과 예배 제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과 달리) 남북 왕국을 통틀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포괄적입니다. 그리고 남북왕국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었다는 점입니다.

 

남쪽의 여러 선지자들이 북쪽 이스라엘을 위해 예언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지파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다름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음 함께 누려야 한다는, 모든 민족으로 대상 범위를 설정합니다. 또한 모든 일에 우상 숭배’ 통한 두려움과 착취와 지나친 욕심에서 나오는 삶의 방식을 정죄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역대기 기자가 남쪽 유다 왕과 예배 제도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은,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언약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범위 설정과 통혼을 통한 언약 백성의 순수성을 저버린 북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정죄의 의미가 숨어 있겠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서, ‘이방의 갈릴리’ 다시 은혜의 빛이 비취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회복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품은 나눔과 됨의 대상은 어디까지이며, 그에 준하는 예수 선교 공동체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