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3 15:16
므낫세는 히스기야와의 공동통치 기간 11년을 포함하여 55년을 다스린 왕입니다. 안타깝게도 가장 긴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들로 보냈습니다. 그의 통치 때에(BC 696-642) 앗수르는 산헤립 (705-681), 에살핫돈 (681-669), 앗수르바니팔(668-627) 등 세 왕이 통치했습니다. 그의 배교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당시 앗수르 왕들에게서 간섭을 받지 않았고,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로마 시대 때처럼) 제국이 어떤 종교를 강요하는 일도 없었는데도, 스스로 메소포타미아나 당시 팔레스타인의 종교에 팔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에서는 간략하게 그의 배교와 악행을 나열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정해진 심판을 서술함으로 이미 기울어진 남유다의 멸망에 대해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역대기에서는 그의 통치 말년에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회개하고 돌아온 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역대기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통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와 열왕기 대조에 대해서는 8/4 묵상글 참조)
기적을 체험하며 병이 나아 15년을 더 살게 된 히스기야가, 그 중 마지막 10-11년 그의 아들과 공동통치를 했는데도, 과연 므낫세는 무엇을 배웠는지, 왜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성경은 남유다가 히스기야 때 산헤립에게 그토록 많은 조공을 바치고도, 하나님이 다시 넘치는 복으로 채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곤고할 때" 더욱 범죄했다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부유한 중에' 더욱 범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앗수르의 간섭을 받지 않았던 약 40년 넘는 기간을 '포로로 잡혀가서 회개했던 그 마음으로 히스기야의 개혁이 내면화 되도록 더욱 박차를 가했더라면...?' 진한 아쉬움과 함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좁고 근시안적인 안목과 패역한 삶에 대해 회개합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전후 - 남유다 멸망 전후 국제 정세
(참고로, 화살표 방향은 공격/침략을 뜻합니다.)
산헤립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을 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또한 국내 정세로 인해 급히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후 20년 가까이 그의 아들 엣살하돈이 왕이 될 때까지, 그는 주로 앗수르 남쪽의 엘람과 바벨론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다시 서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에살핫돈은 초기에는 북쪽에 있는 우라투(현재의 아르메니아)와 그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 해당하는 코카서스 북쪽에 흩어져 살면서) 자주 앗수르의 서쪽 경계선을 넘나드는 당시 유목민 킴메르를 다뤄야 했고, 점차 다시 반기를 드는 시돈과 애굽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애굽 1차 원정은 실패했고, 2차 원정(671년)은 성공했습니다.
앗수르바니팔은 다시 반기를 든 애굽을 쳐서 이겼고, 이 때 (667년)와 이전 에살핫돈의 원정 때에 므낫세가 앗수르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살핫돈은 아들들에게 통치권을 분산시켜 주었는데, 사마스숨우킨은 바벨론 지역의 총독으로 있다가 652년 앗수르바니팔에게 반기를 들고 내전을 일으킵니다. 3년 간의 포위 끝에 앗수르바니팔은 바벨론성을 함락시키고 불태웠으며, 사마스숨수킨은 그 때 불에 타 죽습니다.
학자들은 마침내 앗수르바니팔이 이 때부터 제일통수권자가 되었고, 므낫세는 이 때 이후에 잡혀간 것으로 봅니다. 폐허가 된 이곳에 므낫세를 잡아왔던 것을 보면 아마도 므낫세가 사마스숨수킨을 지원했거나, 아니면 이 때를 틈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앗수르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포로를 잡아갈 때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입술을 갈고리로 꿰어 끌고갔다고 합니다. 당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처럼, 전향한 봉신들은 다시 본국으로 보내져 왕노릇하게 했고, 므낫세 역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몇년 간 더 통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 IVP 성경배경 주석, 대하 33:5-11, 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p. 36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