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02 09:05
요한복음 18-19장에는 예수님이 잡히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과정(18:28-19:16)은 교차대칭구조(chiasm)로, 그 핵심 구절에서 자색옷과 가시왕관을 쓰시고 고난과 조롱 받으시는 예수님이 곧 유대인의 왕(이자 모든 민족과 온 세상의 왕이 되시는 분)임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19:1-3). 불쌍하게도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은 자신들의 힘만 믿고, 그분을 경배하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베드로도 같은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합니다 (18:11).1
빌라도는 단순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는지를 확인하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이유 때문에 소요가 날까 두려워하여 죄없는 예수님을 사형에 내어줍니다. 대제사장들도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될까봐 빌라도의 관정에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자신들이 가진 종교 권력에 위해가 되는 예수님을 처단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위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더욱이 바라바를 놓아달라 함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고,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처형해 달라 외친 이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2
예수님은 잡히실 때부터 그분이 스스로 잡히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3 하는 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 그분의 권능이 나타나 병사들이 뒤로 나자빠지고, 이런 일들을 통해 여전히 예언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십니다. 이는 재판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입증되는 것처럼,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이 세운 제국과 종교제도에 판단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대제사장들과 빌라도가 천국의 왕이신 주님께 판단받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시 한번 1세기 말에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그들이 '주와 함께 다스리는 자'들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며,4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심판하는 천국의 권세를 누리라고 명하심입니다.
1.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힘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 동안 십자가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제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 군사들을 피해 도망했던 제자들 중에, 요한과 베드로가 멀찍이서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요한이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어서, 베드로를 가야바의 집 안에 들어가게 해주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 권세의 위력에 눌려 주님을 부인함으로, 다시 한번 그가 여전히 세상적인 생각(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도 잃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통해, 그들이 돌이킨 후에 주님을 따를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를 받아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2. 바라바의 이름 뜻은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어떤 아버지의 아들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민란을 일으킨 죄목으로 감금되어 있던 그를 대신 놓아달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로마를 대적하는 반란자로 처형해 달라고 하는 그들의 요구에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7번의 '나는 ~이다' 하는 표현 외에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또한 본문의 병사들에게 "내가 바로 그이라" 하는 신적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물위를 걸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6:20) 권능이 드러난 측면에서 가장 비슷한 문맥으로 보입니다. - 7/18일 묵상글 각주 2번 참조
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정론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인데, 이와 함께 믿음을 지키며 이 고난을 이겨낸 성도들이 주와 함께 다스린다는 점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계 5:9-10, 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