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3 14:10
위클리프에서는 성서공회와 협력하여 원치 않는 내전과 질병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치유를 돕고 있습니다. 너무 겁에 질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트라우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지적 육체적 마비 상태에 있게 됩니다. 멀쩡하다가도 유사한 상황이 오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지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치유의 말씀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막습니다. 더욱이 단순하거나 미신적인 신앙이 결부되면, '재앙이나 어려움은 곧 하나님의 저주'라는 공식에 따라 하나님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빠집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트라우마 상황을 억눌러 간직하기 보다는 꺼내어 표현하고 씻어내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잘 사용되는 것이 희화된 상황극입니다. 이를 통해 원치 않은 상황에서 빚어진 가해와 피해의 상처를 씻어내는 첫걸음을 뗍니다. 마음과 생각이 열리고 그들의 말로 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를 받아들이게 되고, 치유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당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였습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그 끔찍한 상황을 그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했겠습니까. 본문을 있는 그대로만 보면, 너무나 처절하게 망가진 나머지 망연자실, 넉두리 하는 노래로 들립니다. “예, 하나님, 맞습니다. 이런 벌을 받아 싸지요. 멸망 당한 주변 민족들보다 더 나빴으니까요.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는 또 새롭게 부어주시지 않습니까?”
출애굽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처럼,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심판 받는 그 땅 백성들보다 더 악한 상황에 빠졌기에, 멸망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 베푸심은 회개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용서와 새 희망이 되십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애가의 말미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화 회복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예레미야애가 5:20-22>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
이처럼 논리적인 추론에도, 그들이 당한 참담하고 끔찍한 멸망의 과정과 결과는 그들에게 트라우마처럼 작용하여 그들의 넋을 빼놓고, 말씀의 진리로 스스로 치유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가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을 보면, 정말 비참한 망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몇 가지 원인들을 짚습니다. 한 마디로 사회 어디를 보아도 답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1. 일반인들의 타락: 소돔과 같이 되어버린 죄악의 성읍
2. 지도층의 타락: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와 타락, 오히려 의인들의 피를 흘림
3. 지도력과 정치 외교의 부재: 왕의 실정과 지도력 미흡, 도움 얻지 못할 외국 의존
되돌려 적용해서 말하면, 선교지에서는 건강한 사회가 설 만한 시스템과 그것을 선하게 움직일 믿음의 사람들이 없습니다.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치 언더우드 선교사가 오직 어둠 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의 말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둠의 구한말 조선 땅에 이미 우리말로 된 말씀을 부어주시고, 이제 그분의 성령을 부어주시려고 선교사들을 불러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억눌리거나 압도되지 않고, 아픈 자와 함께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선교입니다 (롬 12:15, 마 11:17). 그러면, 말씀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