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1 06:10
이삭을 주시마 약속해 주신 때부터 마침내 사라가 이삭을 낳기 전까지, 그 사이에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죄악의 외침이 하늘에 사무치는 소돔과 고모라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로 인한 롯의 자손의 형성 배경입니다. 극도의 두려움과 고립 속에서 친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는 롯의 두 딸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라의 출산의 배경이 됩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의 중보입니다. 그가 중보했을 때, 생명 구원과 씨의 번성이 이뤄집니다. 이삭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롯이나 아브라함 모두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외인 ‘우거함’의 뜻 21:1, 19:9)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주민인 그랄 사람들에게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십니다. 더욱이 믿음 없(어 보이)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에도, 약속의 아들 이삭의 어머니인 사라를 지켜주십니다. 앞서 나오는 롯과 두 딸의 이야기에도 구원이 있지만, 여호와 앞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여 완전하게 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다릅니다.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에는 이처럼 믿음 없는 우리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춰져 있습니다. 동시에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와 제사장 되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민족들에게 복주시는 하나님의 선교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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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는 표현은 창 23:4, 레 25:23, 25:35, 25:47에 나옵니다. 원어로는 גֵּר־וְתוֹשָׁ֥ב (게르 베토샤브)인데, 외인으로서 당신들 중에 함께 거하는 사람이란 표현입니다. 우리말성경(개역개정)은 창 23:4절서만, 게=나그네, 베토샤브=거류인으로 번역하고, 다른 곳에서는 '거류민과 동거하는 자'로 상황에 맞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대화 상황으로 보면, '당신들의 호의로 당신들 중에 거하는 외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여러분의 호의를 구합니다'라고 말하는 수사적인 발언입니다. 예전에 롯을 구할 때 이들과 “동맹”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주 겸양을 갖춰 조심스럽게 상대를 높이며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땐, 그들 중에 거하기는 하나 땅을 소유하지 못한, 여전히 정주민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화교들이 아주 최근까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그 땅을 차지했을 때도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저 그 땅에 '거하는 외인'(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 자리매김 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