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1 12:23
바울은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 삶과의 긴장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을 잘표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힘 있고 놀라운 일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을 질그릇에 비유하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의 진리를 보배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썩어 없어질 몸임에도 그리스도로 인해 영원히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앞서 유대주의자들이 행위로 보여주는 모습에 대해 유대교의 문화 전통에 갇혀 있는 것을 지적했던 바울은, 이제 헬라적인 영육이원론이나 그에서 비롯된 영지주의와 같은 신비주의 사상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육체는 영원하지 못한 물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몸에 갇혀 지내는 것은 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벗어나 순수한 영의 상태에 있는 것이나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의 지식을 부여받는 것(비전)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벗는 것이 아니라 덧입는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5:3-4).
일반적으로 죽음은 우리 몸을 삼켜 썩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망을 삼키게 되면, 우리 몸마저 영원히 썩지 않는 것으로 변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하고 악한 질그릇 같은 우리 인생이지만, 이 안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이 있기에, 이 땅에 살면서도 마치 영생하는 몸을 입고 그분과 함께 거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살았던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썩을 몸에 살면서도 주와 함께 썩지 않을 몸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1. 5:6-8절 내용은 잘못 생각하면 갑자기 앞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이분법적 의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정확하게 병행구조로 6절과 8절 대조하고 있고, 그 가운데 7절의 핵심 구절을 넣었습니다. 즉,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체와 그 자랑으로 살지 않고, 아직은 온전히 이뤄지지 않은 것을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즉, 아직 온전한 천국이 임하지 않았기에, 주님과 온전히 합하여 사는 데에는 제한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 담대하게(/확신하여) 아는 것처럼, 주님에게서 떠나 몸에 있는 줄
7절, 믿음대로 행하기 때문에, 보는 대로가 아니라
8절, 담대하게(/확신하여) 바란다, 몸에서 떠나 주님에게로 있기를
주님'에게서 떠나'와 주님'에게로 있기'로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엨-데메오 아포 (ἐκδημέω ἀπό)'와 '엔-데메오 프로스(ἐνδημέω πρός)'로 접두사와 전치사가 정 반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엔데메오는 '집에 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후에 바울의 3층천 신비 체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놀라운 천상의 비밀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신비한 체험을 했던 것과 유사한 것으로, 거기 초막을 짓고 그대로 지내자고 했던 제자들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산 위의 신비체험과 상반되는 산 아래의 인간 환경에서 여전히 말씀 선포와 축귀와 치유를 동반한 천국 복음 전파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놀라운 천상의 삶을 살기 원하나,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는, 특히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하여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영육이원론의 사상보다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이 땅에서 이미 그것이 임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