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5 11:22
야고보는 4장 말미부터 5장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적은 부 즉 맘몬의 우상을 추구하는 인생에 대해 경고하고, 함부로 장담하거나 맹세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반대로 그들의 압제에 신음하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그렇게 핍박받았던 선지자들을 기억하며 욥처럼 인내하라고 합니다. 또한 죄와 치유와 회복의 문제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다뤄져야 함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거리 해외 무역만큼 이문이 많이 남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여러 가지 통제할 수 없는 많은 위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와 같은 제국의 이점은 이런 면에서 상인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따라서 그런 위험들에도 많은 이문을 남긴 사람들은 그들이 성취한 것에 대해 자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들이 '하나님의 뜻이면'이라고 하는 말에, 진정 하나님의 주권과 또한 그분이 이뤄주심에 대한 인정과 감사가 없음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좇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침 안개처럼 쉬 사라지는 물질이요 맘몬이라는 우상이었음이 5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있습니다. 품군의 삯을 착취하고, 사악한 이득으로 방종하며, 그 힘으로 도리어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1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이지만 그것이 타인과 피조물에게도 연계되어 나타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죄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그렇고 가인과 아벨의 관계, 또한 라멕과 같은 이가 보여주는 잔혹함은 작게는 기본적으로 가족공동체로 시작해서 사회공동체 전체와 피조세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직접적으로 피해 당사자와의 관계는 물론, 역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기억하고 함께 다뤄져야 합니다. 그만큼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회개와 용서와 화해의 치유 공동체여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를 그 예로 든 것은 너무나 적실합니다!2
1. 어리석은 부자가 다름 아니라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에 대해 집착하고 더 쌓으려고 했을 뿐, 바로 집 앞에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무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흩어 구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눅 12:16-21, 시 39:5-7절 대조, 시 112:5-9).
2. 엘리야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습니다. 일시적이나마 북쪽의 앗수르 세력이 잠시 약해진 탓에 정치 경제적으로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근을 보내시고 엘리야를 통해 그것이 물질과 쾌락을 좇는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문제임을 깨우치시고자 했습니다 (왕상 17-1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