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더 이상 친구들의 말에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며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고하게 고난 당한다는 사실에 더 확신을 가지면서 이 일을 하나님께로만 가져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하나님이 만나주시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속시원하게 답을 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게 됩니다.
물론 여전히 이 과정에서 간접적으로는 친구들의 고소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24장에서 자신이 (엘리바스가 고소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24:2,9)이라고 지칭하는 행악자들, 혹은 구체적으로 범죄행위를 지적한 대로 빛이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24:13), 살인/간음/도적질하는 자들 (24:14, 15, 16)의 길로 가지 않았다고 확실히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신의 걸음을 알고 계시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욥은 인내로 견디며 회개하여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기다리라는, 과녁에서 빗나간 친구들의 위로 때문이 아니라 (10/17일 묵상글 각주 참조), 하나님 앞에 서야만 결판이 나리라는 확신 때문에 스스로 이 과정을 견뎌내야 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걸음을 알고 지키시며 이 시험을 통과 하고 나면 “정금 같이” 전보다 더 순전하게 될 것이라고 소원하게 됩니다 (23:10-11). 베드로가 무고히 고난 받는 초대교회 형제들에게 그들이 당한 ‘믿음의 시련’이 불로도 살라지지 않는 정금보다 더 귀하다고 격려한 말이(벧전1:7), 욥의 고난을 통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닙니다. 애시당초 정금이었던 것이, 또한 시련의 풀무에 더 순전해지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성경번역 선교를 위한 주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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