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담 왕과 아하스 왕의 통치 사이에 급 반전이 일어납니다. 흥미롭게도 학자들은 743-730년 사이에 웃시야-요담-아하스 세 사람이 모두 공동 통치 기간에 있었다고 봅니다.1 요담은 종교 정치에 있어서 선왕 웃시야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 받아 갔지만, 아하스는 정 반대로 극렬하게 우상을 섬기고, 친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역대기는 모든 면에서 아하스의 배교와 친 앗수르 정책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요담이 아버지와 달리 함부로 성전 제사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27:2), 웃시야에 이어 정치/경제/군사에서 모두 형통했음을 증거합니다. 다만 왕은 올바로 행했지만,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했다고 기록하여 (27:2),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부터 (기원전 735년) 적극적으로 통치에 나선 아하스가, 바알 숭배, 자녀 제사 등의 악행을 저지르고 아무 소득이 없는 친앗수르 정책 펴기와 성전에 다메섹에서 보고 와서 본뜬 우상 제단 세우기 등 어리석은 짓들을 합니다.2 하나님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 받으라 했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애써 소득도 없는 앗수르에 조공 바치는 것을 택합니다. 더 많은 조공을 바치라고 다메섹을 점령한 디글랏빌레셋에게 불려갔을 때도, 되려 패망한 아람의 우상을 섬기겠다고 하는 등 그는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구하지 않았어도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하심으로, 호세아가 보여준 것과 같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짝사랑을 보여주십니다.3 성경번역 선교를 위한 주간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