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최종 진술 후에, 곧 하나님이 답하실 것을 기대했지만, 이야기는 다시 엘리후라는 젊은 사람이 끼어들어 욥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엘리후의 이야기가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엘리후의 이야기가 있음으로 인해, 연기된 클라이맥스, 하나님의 주권이 더 강조되는 점, 욥처럼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더 도움을 주는 점 등등 엘리후의 이야기로 인해 더 풍성한 내용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대답 없이 연이어 네 번의 진술을 하게 되는데, 앞서 친구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욥의 고난이 그의 과거 죄 때문이 아니라, 욥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미리 단련하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잘못할 일들이나, 교만하게 될 것을 막으시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영혼을 멸망에서 건져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33:17-18). 그렇다고 해서 욥을 두둔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는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암시적으로 하나님을 불의/부당하시다 말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이처럼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효과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또한 욥이 자신의 의로움과 무죄함을 항변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의하시고 부당하신 분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일례, 10:3), 그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분노가 치밀어올랐고 (32:2, 3, 5), 마침내 욥과 친구들 모두를 향하여 교훈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세 친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반면 엘리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는 점을 보면, 엘리후가 어느 정도 간극을 메우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면서도 (시 119:100) 다른 관점에서 욥의 상황을 조명하여 줌으로, 고난을 당하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에게 주시려는 유익을 인정하고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10/31일 묵상글 마지막 부분 참조)
성경번역 선교를 위한 주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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