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성공 혹은 성취의 맛을 보는 게 좋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시 이루고 맛보기 위해 또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정당화로 이어지고 남을 비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열심히 했고, 성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이런 패배를 맛보다니… 분명 누군가 잘못한 게 틀림 없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어떤 일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나는 바른 일을 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잘 되어야 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 사람의 편이 되어주셔야만 의롭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그리고 수장 여호수아가 절망스런 맘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원망 조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7:7-9).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시려고 홍해를 건네고 광야를 거치고 요단강을 넘어오게 하신 것입니까?” 이에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수 7:10)
이를테면 ‘내가 물어볼 말이 바로 그거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더니… 지금 네가 바로 그 격이구나!’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작은 패배를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사명(mission)을 수행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상기시켜 주십니다. 은혜입니다!
당시에 신의 이름을 걸고, 전쟁의 승리로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영토 확장이나 자신들의 욕심을 얹어놓고 신의 이름을 거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이 가나안 땅에 그를 부르시고 하시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예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심판이라면,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가나안 민족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 15:16).
여기에서 '진멸'은 번제와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야 합니다. 화목제와 같이 제사장과 제사드린 사람들이 나눠 먹을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결과의 의미로 히브리어 חֵֶרֶם ḥērem의 영어 번역은 '금(禁)'의 뜻을 가진 'ba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창 17장, 출 4:24-26, 수 5:1-12). 그들 안에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먼저 몰아내야 했습니다(창 35장 참조). 마치 제사장(과 성물을) 먼저 성결케 한 후에 성직을 수행토록 한 것과 같았습니다 (레 8-9장).
선교적으로 볼 때, ‘진멸’은 죄와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문화’에서 깨끗케 되는 것입니다. 진멸의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과 교류하고 혼인하게 될 때,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을 우상을 섬기는 데로 돌이키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라합이 구원받은 이유는 그녀가 이미 ‘진멸’될 성의 운명을 알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 편에 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수 2:10절과 전후 문맥). 아간은 너무나 대조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도리어 진멸되어야 할 그 땅의 것을 가져와서, 그것과 같은 운명, 즉 ‘진멸’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공동체의 생명과 안위와 사기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따라서, 소위 십자군 전쟁 식의 위선과 탐욕이 뒤범벅이 된 정치적 ‘성전(聖戰, holy war)’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 식의 힘을 주체 못하는 팽창의 개념을 가진,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팽창이 선교와 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과 마음과 생각이 먼저 ‘진멸’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mission)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의 혼합주의를 경계하기 이전에 선교하는 교회가 얼마나 혼합주의에 쩔어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섞여 있는 더럽고 썩은 찌꺼기 문화들을 먼저 제해 내야 하고 말씀으로 다시 구속해야 합니다.
또한 이 일이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라면, 여기에는 군인의 수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교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마 28:18,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온전한 헌신과 그분의 뜻에 부합한 삶입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내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일까? 왜 선교 사역이 어려움에 부딪히고 아무 진전이 없는 것일까…?’ 이런 원망스런 질문은 우리 안에 자리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저희 자신을 다시 돌아볼 뿐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약할 때 강하여 짐이라 고백해야 합니다 (고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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