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교회에서는 신약 성경을 보면서 마태복음의 대위임령이나 다른 복음서 마지막의 선교 명령, 사도행전 1장 8절과 바울의 이야기 정도를 선교의 관점에서 다루고, 나머지는 보통 목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 목회의 관점이란 주로 위로와 격려, 영적 성숙이라고 표현되는 양육과 선한 삶의 실천을 위한 책망과 권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한 신학자의 예를 들면서,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본문 주해를 할 때, 본문의 뜻을 다 밝히고 난 다음에 선교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순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자체가 이미 선교의 상황에서 최초 수신자들의 언어/문화에 상황화 된’ 일들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바울 서신서는 모두가 선교적 상황과 관점에서 쓰인 것을 그런 대로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신자들이 모두 바울의 선교여행 결과로 생겨난 지역교회들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이 속한 지역에서 또한 다른 지역이나 타민족을 위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복음서들 역시 그런 선교적 상황에서 쓰였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제외하고, 누가복음은 바울과 동시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이후에 쓰인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였고, 요한복음은 4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쓰였으며 네로 황제 핍박 이후에, 도미티안 황제 때 다시 핍박이 일어났던 1세기 말이 그 배경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과 마찬가지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하다가 핍박으로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라고 하면 이미 다양한 민족들이 구성원이었을 것이고, 이 복음서를 회람해서 보는 교회 전체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2-13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내용이 이미 적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구절이나 갈라디아서 구절을 먼저 읽고 요한복음 구절을 읽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골로새서 3:9-11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 (참조, 갈 3:27-29)
요한복음 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얼마나 힘있고 놀라운 선언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마음에 모신 사람들은 1) 성별과 피부색과 출신에 상관 없이 어느 민족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2) 그리고 그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십니다. 바로 사도행전 1:8절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고,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선언대로 그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헬라문화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예수님을 로고스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씀하시면서 그분과 만난 유대인들 사마리아인들 그리고 열방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선교하시는 놀라운 예수님을 다시 한번 만나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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