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5 08:37
고린도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들을 보면 왜 이처럼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셨는데도 삶이 바뀌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적확하게 지적하고 답을 내는 것처럼, 그들은 유치하게 편을 나눠 도토리 키재기식 자랑과 경쟁으로 일관했을 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근간이 되는 개인적인 삶의 성숙과 공동체 세움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하나로 모아 그들을 영적인 사람들로, 신령한 교회로 세워가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은사의 다양함과 그것을 사용한 사역과 힘은 똑같습니다. 문제는 각자가 각기 다른 것을 자랑하고 더 잘 났다고 다툴 뿐 힘을 모으지 못 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 힘을 주신 원래 근원이신 삼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 '하나'됨을 강조하고,1 또한 그분이 의도하신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2 하는 '목적으로 하나'되게 합니다. 이것을 비유로 풀어낼 때 머리 되신 주님과 그 지체로 하나되어 서로를 돌보는3 몸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바울은 여러 은사(말씀의 지식/지혜, 신유=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들이 교회 직임 구조의 (사도, 선지자, 교사 등) 지도 아래서 사용되어야 함을 덧붙입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여러 은사들 중에 더욱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와, 이런 은사들을 사용하는 비할 데 없이 좋은 길을 보여줍니다. 그 기준은 바로 덕 세움, 곧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4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소극적인 표현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는 지체를 돌보고 전체 교회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뤄집니다. 퇴행적인 치기 형태의 이기적 은사 사용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며 참고 견디며 온전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사랑이 답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에 질서 있게 서로를 세우며 예언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어떤 은사도 소멸치 않고 모든 은사들을 격려하면서도 교회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1. 바울은 12:4-6절에서 성령님과 주님(예수님, 12:3절 참조), (성부) 하나님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다양한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나눠주신 분은 같은 삼위 하나님 한 분이신 것을 강조합니다. 다양한 은사의 근원이 한 분이시므로, 모두가 다 그 은사를 주신 동일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삼위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을 통해 교회의 일치/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12:7절의 유익하게 한다는 말의 헬라어 동사는 '쉼+페로'(συμφέρω)입니다. '함께 가져와 (쌓는다)'는 뜻으로 그 결과 얻게 되는 유익까지 뜻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역들을 각기 제 자랑 위해 산발하기보다는, 일심으로 합력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될 때 엄청난 유익이 있게 됩니다. 말 한 마리가 끄는 힘을 1 마력(horse power)이라고 하는데, 두 마리가 같이 한 방향으로 힘을 합해 끌면 20 마력이 넘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팀웍을 사용할 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될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3. 돌본다는 말, '메림나오 (μεριμνάω)의 원 뜻은 '서로를 염려하여 노심초사 하는 마음'입니다. 지체를 돌보지 않는 것은 '자해' 심지어는 '자살' 행위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바울이 쓰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다양한 지체의 비유는 여러 면에서 정말 탁월합니다. 다양한 은사를 주신 머리되신 주님의 의도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이들어가며 생각한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처럼)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4. 프레임 전쟁(frame)이란 말이 있듯이, 각기 다른 세계관마다 서로가 믿는 믿음에 따라 가치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떤 기준에 따라 좋고 나쁨/선과 악이 결정되는가가 중요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여전히 세속적인 헬라식 다신론의 가치관에 머물러 있고,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로 대변되는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여러 신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모습과,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비어 내어주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삼위 하나님의 합력하시는 모습은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는, 전혀 배치되는 원리입니다. 바울은 이런 점을 간파하고,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한 성경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바로 이 기준에 동의해야만 하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