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1 13:27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 남쪽 유다가 그 화를 면했던 것에는 몇 가지 표면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아하스가 취한 친 앗수르 정책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지리적 특성 때문입니다. 남쪽 유다와 특히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왕의 대로에서 벗어나 있고 높은 산악지대에 있었기에, 앗수르가 자주 애굽을 다스렸음에도 유다가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앗수르의 주변국, 특히 당시 신흥국 바벨론과의 상황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던 까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왕 아하스가 죽고 난 뒤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 이상 앗수르를 섬기지 않았고, 당시 사르곤 2세가 애굽이나 주변국에만 신경쓸 때여서 문제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팔레스타인의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의 몇몇 도시국가들이 다시 반기를 들었고, 애굽이 이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히스기야도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1 사르곤 2세의 아들 산헤립이 왕 위에 오르고 주변 문제를 정리한 뒤에 드디어 팔레스타인과 애굽의 반기에 대해 징벌하게 됩니다. 두로와 블레셋 지역을 점령한 산헤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 라기스에서 아래로는 애굽(과 그들을 도우러 온 에디오피아 원군)을 평정하고 위로는 예루살렘에 신하들을 보내어 완전히 항복하고 다시 복속될 것을 위협합니다.
히스기야는 일차적으로 성전 금 입힌 것까지 벗겨내어 갖은 보물을 바쳐 무마하려고 했습니다만 (18:13-14), 애굽마저 치고 온 산헤립은 부하 장수 셋을 보내 마침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항복하라고 위협했습니다. 유다는 당시 주변 모든 나라들이 앗수르에 정복당하고 굴복한 상태에서 혼자만 남은 터라, 이사야의 표현대로 (사 1:8) 마치 큰 밭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원두막 같았습니다. 이 때를 위해 히스기야는 장기전에 대응할 수 있는 대형 수로 공사를 해서 외부에는 물을 끊고 성안으로만 물을 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힘써 준비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로 향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와 응답의 말씀을 주십니다.
1.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나서 바로 아스돗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동맹이 맺어졌고, 애굽과 구스가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충고대로 아스돗의 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 20:1-6절). 사르곤2세는 BC 712년 아스돗을 징벌했고, 아스돗의 친애굽/구스 왕이었던 야마니는 애굽으로 망명했지만 애굽의 배반으로 앗수르로 끌려갑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일시적으로 다시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을까 추측이 가능합니다.)
12/12일 묵상글 (이사야 18-20장) 참조:
http://wordlovers.ca/index.php?mid=RBBBReadingPlanBoard&page=20&document_srl=15084
그러나 바빌론지역에서 부로닥발라단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르곤2세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두로를 중심으로 아스글론과 에그론이 결탁하여 애굽의 샤바코를 등에 업고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정치 정세 상 앗수르가 양면에서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히스기야는 양쪽에 다 손을 내밀어 동맹에 가담하였고, 사르곤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산헤립은 먼저 바빌론 반란을 진압하고 BC 701년 서쪽의 반란을 진압하러 왔습니다. 산헤립은 두로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응징하고, 동맹에 가담한 남유다도 응징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목을 조르듯)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략적인 길목 라기스를 점령하고 애굽의 원군도 처결한 뒤에, 부하 장수들 셋을 보내 가공할만한 두려움을 조장하며 항복을 강요합니다. 이 상황이 바로 왕하 18-19장에 나오는 내용의 배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