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6 11:42
요시야 왕이 죽고 그의 아들들과 손자가 차례로 왕이 되지만, 이미 나라의 운명은 바벨론의 위력 앞에 굴복한 상태였습니다. 선지자의 경고에도 이스라엘 왕들은 계속해서 애굽을 의지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서너 차례 애굽과 바벨론의 전투에서 애굽은 완전히 밀려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빼앗깁니다. 이스라엘은 3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그나마 누릴 수 있었던 속국의 자치권도 애굽으로 간 반란 세력에 의해 무산됩니다.
요시야에게 훌다 선지자를 통해 예언해 주신 대로 이미 유다의 멸망은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멸망이 이미 결정된 것임을 예언하며 (렘 1:5, 살구나무와 끓는 가마), 하나님의 벌을 달게 받고 그분의 구원과 회복을 기다릴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왕과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애굽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1차 포로는 왕족과 귀족들이 (605년), 여호야긴 시대의 2차 포로에서는 군인과 기술자들이 (597년), 3차 포로 때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완전히 부서지고 망하며, 제사장들과 친위대 수천 명의 저항군들이 붙잡혀가고 죽임을 당합니다 (586년).
포로기 전후의 이야기와 선지서들의 전체적인 어조를 보면,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디아스포라로서 흩어진 곳에서도, 또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이스라엘 땅에서도 다시 세워질 것을 목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부 남겨진 사람들은 바벨론의 통치에 순복하라는 말씀을 저버리고, 지역 관리자로 세워진 서기관 사반의 손자 그달랴를 죽이고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렘 24장, 두 무화과 광주리 비교). 히스기야와 요시야와 같은 일시적인 개혁에도,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완고하게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내다 이처럼 한순간에 망합니다 (잠 29:1). 여호야긴이 풀려나서 바벨론 궁정에서 회복된 신분으로 대우 받는 이야기를 통해, 열왕기서는 장차 하나님이 허락해주실 회복을 기대하게 합니다.
바로 느고 2세는 앗수르를 도우면서 비록 갈그미스 전투에서는 실패했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통해 실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를 므깃도 전투에서 죽이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유다 왕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우며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 (기원전 609년).
1차 포로 (BC 605)
그러나 605년에 다시 애굽 단독으로 바벨론과 벌인 갈그미스 전투에서 완패하고 물러나게 되며, 바벨론은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소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느부갓넷살 왕은 다니엘을 비롯한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1차 포로)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
2차 포로 (BC 597)
그러나 602년에 지중해 해안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 싸움이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애굽과 바벨론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이 때를 틈타 여호야김은 다시 친애굽 정책으로 돌아섭니다. 느부갓넷살 왕은 유다 주변국들을 사주하여 유다를 치게 하고, 많은 보물들을 빼앗아 갑니다. 마침내 느부갓넷살이 직접 올라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이 와중에 여호야김은 사망하고, 여호야긴은 왕이 된 지 3개월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597년, 2차 포로). 이 때 왕과 함께 많은 목공장인과 금속장인들이 다 끌려갑니다. 다시 말해 나라로서 기능할 수 없도록 기술자들을 다 없앤 것입니다.
3차 포로 (BC 586)
바벨론은 시드기야를 세우고 물러갔지만, 시드기야도 결국 5년차부터 친 애굽 정책을 펴고, 이로 인해 느부갓넷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 공략하고 2년의 포위 끝에 유다는 망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586년, 3차 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