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7 06:27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할 때, 유다와 요셉에 대한 축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유다에게는 ‘장자됨’ (cf. 25:23) 즉 ‘리더십/다스림’의 복을 예언합니다. 유다가 모든 지파를 (혹은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49:8-12). 요셉에게는 ‘장자의 몫’이 주어집니다. 다른 형제의 두 배입니다.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요셉의 분깃으로 주어지고, ‘풍성함’의 복이 넘치게 부어집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축복하는 자로서의 야곱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한 것처럼, ‘모든 환난’ 가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지심을 받은 자입니다 (48:16). 그가 체험한 그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고, 더 크게 복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이 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경험한 복주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복 주시길 구했습니다.
한 가지 더, 복의 경계에 관한 것입니다. 샘 곁의 무성한 나무, 요셉의 가지는 담을 넘습니다. 야곱의 죽음 뒤에 요셉이 형제들을 위로할 때 한 말처럼, 요셉은 자기 가족(/이스라엘 민족)만 구한 게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많은 사람들/민족들을 구했습니다 (45:7, 50:20). 이보다 더 분명하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선교의 목적이 가시적으로 이뤄지는 예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영적인 이스라엘은 오늘도 동일하게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자기 자손과 곧 이 언약 백성이 될 다른 민족들에게 복이 되는, 축복의 삶을 삽니다.
1.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복 주심'의 수직적 관계와 '복됨'(축복)의 수평적 관계가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함께 잘 나타나 있다고 지적하며, 야곱이 a.창조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복의 근원이시고, b.그분이 바로 자신의 삶으로 체험한 인격적인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네 아비의 하나님”)이시며, c. 본래 창조 때 의도하신 풍성한 복을 요셉을 위해 기원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 see p. 211, Mission of God, by Christopher Wright. (하나님의 선교, pp. 265-266.)
2. 전능자, 창조자이신 그분이 반석이 되시고, 목자가 되십니다. (그의 벧엘 경험에서 볼 수 있는 반석[에벤, אֶבֶן AeBeN]의 이미지는 ‘안식처, 하늘과 땅의 연결점=구원과 채우심의 복, 예배처’ [28:11, 18, 22]입니다.)
3. 무성한 가지 or 들망아지?
49:22절은 원어대로 직역하면, ‘요셉은 번성하는 아들, 샘 곁에 있는 번성하는 아들이다. 그 딸들이 담을 넘는다’ 입니다. 개역개정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과 마찬가지로 ‘열매 풍성한/무성한’ 가지로 번역한 반면, 표준새번역은 들망아지로 번역했습니다. ‘무성한’에 해당하는 말이, 들망아지/들나귀라는 뜻과 같은 소리의 페롯(PHeRoT)으로 읽힐 수도 있고, ‘번성하다’라는 동사의 분사형(포랏 PHoRaT)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성한 나무와 가지(들)로 번역한 것은, 샘 곁에 있다는 말과, 앞서 에브라임의 이름 뜻과도 연계 시킨 점, 셋째 부분의 딸들을 의미 연장으로 생각해 ‘그 가지로’ 의역하기 쉬운 점 등이 설득력 있습니다.
NIV 는 ‘아들’은 (포도)나무로, ‘딸들’은 그 가지들도 번역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트를 달았습니다. “1 Or Joseph is a wild colt, / a wild colt near a spring, / a wild donkey on a terraced hill”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형제들을 주로 동물에 비교한 것과, 또한 활 쏘는 자의 조준 대상물로 나무보다는 동물이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셋째 부분 “딸들이 담을 넘는다” 부분을 “층층의 언덕에 있는 들나귀”로 번역해서 지나치게 의역이 됩니다. NLT, JB, TEV, NAB 등이 이렇게 동물로 번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