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2 11:32
'전도서의 저자'가 '전도자'를 소개하고 전도자가 말할 내용에 대해 개괄했고(1:1-11), 이제 전도자가 등장하여 (1:12) 그의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헛되다'는 말은 인생의 불확실성과 원하는 것을 잡아서 내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다양하고 폭넗은 시도와 경험을 통해 인생의 곤고함과 허무함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인해 전통적으로 전도자가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이유에서 솔로몬은 아니고, 그에 비견할 만한 미상의, 혹은 그와 같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전도자는 먼저 인생이 수고와 괴로움이라고 보며, 그 의미를 찾고자 누구보다도 더 큰 지혜를 갖고 이치를 궁구했으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았고, 번뇌만 더했다고 고백합니다 (1:13-16). 또한 인생의 낙(즐거움)을 찾아 누려보고자, 술, 사업(과수원, 묘목, 관개 및 수로 건축, 가축업 등등), 은금, 진귀한 공물, 공연단, 많은 처첩 등을 시도해보았으나 역시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질 않았고, 헛되고 무익했습니다 (2:1-11). 또한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에서 헛됨을 발견합니다. (죽음과 잊혀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본성과, 이 모든 일에 하나님 혹은 신적인 존재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번 정도 의미 있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한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 (2:10),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에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이 그나마 의미 있다고 봅니다. 거창한 일을 위해 참으며 뒤로 미루지 말고, 그 때 그 때 소박한 삶의 기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 (2:24), 이렇듯 소박한 복마저도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만 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체 이야기 속에서 보면, 거창한 지혜와 지식과 인내 등을 생각하며 힘쓴 인생이나 그렇지 않은 인생이나 죽음 앞에 별다를 바가 없다면, 심지어는 그 결과가 뒤바뀌어 보일 수도 있다면, 차라리 그렇게 힘쓰지 않고 소소한 낙을 누리는 게 낫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후에 저자가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귀히 여기시고 큰 것을 맡기십니다.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왕이었던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 합니다 (1:12). 11절의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과 맞물려 전통적으로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자신이 한 때는 왕이었다고 소개한다든지 (과거형 시제), 과거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왕)들보다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다고 하는 말(1:16), 압제 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옹호 (4:1, 5:8), 왕을 폭군에 가깝게 묘사하는 내용 등(10:20)을 보면 전도자가 솔로몬일 수는 없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엄청난 인력 동원을 했던 것이 르호보암 때 문제가 되었던 점, 그로 인해 나라가 갈라졌던 점을 생각해보면 솔로몬이 부역에 대해 4:1/5:8절처럼 말하기 힘듭니다. 이 밖에도 몇몇 외부의 증거를 보아도, 시대상 솔로몬일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솔로몬에 비견할 만한 혹은 솔로몬 같은 미상, 혹은 가상의 인물로 보는 게 맞습니다.
- Tremper Longman III, The Book of Ecclesiastes, Introduction, 'autho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