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5 10:57
시편 143편은 앞선 142편과 같이 정확하게 배경을 설명하는 부제가 없지만, 내용과 어조로 보아 142편과 마찬가지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관점에 따라 3-9절까지 혹은 8-12절까지를 중심축교차구조(chiasm)로 볼 수 있는데, 전자로 볼 때는 3절과 8-9절이 대조를 이루며 주제를 형성하고, 후자로 볼 때는 10절이 중심구절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합해보면 8-10절 말씀이 중심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한번 동원해 보면, 3절의 상황을 사울 왕에게 쫓겨 죽다 살아난 날 밤에 잠을 청하기 전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칠흑같은 그믐 어둠 속에서 드는 느낌이, 마치 사울이 땅을 파서 자신의 생명과 영혼을 땅에 묻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승리하고 형통했던 날들이 너무나 아득합니다 (4-5절). 들판에 누운 자신의 지친 몸을 대지가 빨아당기는 것 같습니다(7절).
그래서 다윗은 애써 옛적 은혜를 기억하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 앞에 들어 올려드립니다 (8d). 의지함으로 기도합니다 (8b). 아침에 눈뜰 때에, 다시 한번 변함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8a). 그래서 내일도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 길을 찾게 해달라고, 여전히 주의 뜻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8c, 10b). 그것도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의에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1-2, 11-12절). 마침내 편편한 땅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이뤄지는 땅에 서기를 간구합니다 (10b). 인생의 칠흑같은 밤과 땅으로 꺼져들어가는 것 같은 밤에도,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인자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8절에 주의 '인자한 말씀'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원어에서는 주의 '인자'(헤세드 חֶסֶד) 뿐입니다. '듣게 하소서'라는 말 때문에, '말씀'이란 말을 추가하여 의역한 것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변함없고 실패가 없으신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