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9 10:10
요담 왕과 아하스 왕의 통치 사이에 급 반전이 일어납니다. 흥미롭게도 학자들은 743-730년 사이에 웃시야-요담-아하스 세 사람이 모두 공동 통치 기간에 있었다고 봅니다.1 요담은 종교 정치에 있어서 선왕 웃시야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 받아 갔지만, 아하스는 정 반대로 극렬하게 우상을 섬기고, 친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역대기는 모든 면에서 아하스의 배교와 친 앗수르 정책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요담이 아버지와 달리 함부로 성전 제사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27:2), 웃시야에 이어 정치/경제/군사에서 모두 형통했음을 증거합니다. 다만 왕은 올바로 행했지만,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했다고 기록하여 (27:2),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부터 (기원전 735년) 적극적으로 통치에 나선 아하스가, 바알 숭배, 자녀 제사 등의 악행을 저지르고 아무 소득이 없는 친앗수르 정책 펴기와 성전에 다메섹에서 보고 와서 본뜬 우상 제단 세우기 등 어리석은 짓들을 합니다.2
하나님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 받으라 했지만, 아하스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애써 소득도 없는 앗수르에 조공 바치는 것을 택합니다. 더 많은 조공을 바치라고 다메섹을 점령한 디글랏빌레셋에게 불려갔을 때도, 되려 패망한 아람의 우상을 섬기겠다고 하는 등 그는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구하지 않았어도 구원을 베풀어주신다 하심으로, 호세아가 보여준 것과 같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짝사랑을 보여주십니다.3
1. 세 왕의 공동 통치에 대해
(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p. 354)
웃시야 BC 792----------------------------------740
요담 750-------------731
아하스 (743)----735----------715
웃시야는 초기 25년 동안 선왕 아마샤와 공동 통치 기간이 있었고, 역시 말년 10년 동안 아들 요담과 공동 통치 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심지어 743년부터 아하스가 요담과 공동 통치를 해서, 삼대가 743-740년 기간에 공동 통치를 했던 것으로 말합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왕위에 오를 때가 아하스 왕 12년 차라고 언급한 것과 (대상 17:1), 호세아의 등극 연도가 기원전 732년인 것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역대하 28:1절에서 아하스가 16년을 다스렸다고 한 것은, 그의 단독통치 시작부터 마지막 통치 때까지를 뜻합니다. (아하스는 729년에 히스기야를 왕으로 세워 14년간 공동통치합니다.)
이처럼 한 시대에 세 왕이 함께 등극해 있었던 이유는 디글랏빌레셋에 맞써 싸운 웃시야의 반앗수르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디글랏빌레셋은 기원전 743-738년에 팔레스타인 원정에 나서는데, 웃시야는 두로-시돈-블레셋을 규합하여 앗수르와 맞서싸웠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므나헴은 조공을 바쳐야 했지만, 므낫세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잘 막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만일의 사태, 즉 혹시라도 이 전쟁에서 패하거나 웃시야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요담은 아하스를 미리 왕으로 세워놓은 것 같습니다.
2. 아람-팔레스타인 동맹과의 전쟁과 소득 없는 친앗수르 정책
르신과 베가의 연합군은 반앗수르 팔레스타인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맞서려 했고, 이에 반대하는 아하스 정권을 끌어내리고 요단 동편 아람 경계 지역에 있는 다브엘이라는 사람의 아들들을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사 7:6 참조). 이에 아하스는 친앗수르 파 신하들과 함께 노선을 바꿔, 앗수르에 조공을 바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조공에도 앗수르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북이스라엘은 남하하여 노략하고 포로들을 잡아가고, 아람은 에돔을 우회하여 남유다가 수비대를 세워놓은 홍해의 항구 엘랏을 점령하여 무력화 시키고, 에돔은 이와 함께 유다를 치고 올라옵니다. 733년 마침내 베가와 르신이 함께 올라와 예루살렘을 봉쇄했고, 그제서야 앗수르가 움직여 갈릴리 지역을 침공해 이스라엘과 아람을 예루살렘에서 후퇴시키고 맙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디글랏빌레셋은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쳐서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기원전 732년). 더욱이 다메섹에서 디글랏빌레셀을 배알할 때, 그는 이미 바친 것 외에 더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조공은 조공대로 바치고,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백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하스는 다메섹에서 우상의 제단을 보고 그것을 본떠서 유사한 것을 예루살렘 성전에 만들어 놓도록 하고, 기존의 제단을 옮기고 이방 제단을 그 자리에 대신 세워 우상을 섬깁니다. 이렇게 조공을 바쳤음에도 혹시라도 앗수르가 쳐들어와 안식일에 사용되는 성전 낭실과 왕을 위한 특별한 출입문을 사용하여 봉쇄 작전에 사용할까 하여, 이것들을 없애기까지 합니다.
참고로, 블레셋과 에돔이 노략한 기록에 대해서는 (대하 28:16-18), 아람-팔레스타인 전쟁 때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 보고, 앗수르에 한번만 도움을 청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두 사건이 다른 경우로 두 번 앗수르에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간략한 당시 정세 설명: 7/31 묵상글 참조
http://wordlovers.ca/index.php?mid=RBBBReadingPlanBoard&page=3&document_srl=14290
3. 이사야의 동정녀 탄생 예언의 일차적 의미
사실 이사야서 7:14절의 유명한 동정녀 탄생 예언도, 바로 이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 아람-팔레스타인 군의 동맹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하나님을 믿고 구하라고 했지만 아하스 왕은 거절했고, 대신 앗수르에 조공을 바쳤던 것입니다. 마치 남녀의 성관계 없이도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처럼, 구하지 않았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일을 약속하십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이 악하게 행하는 아하스였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남유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 스스로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