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 03:59
역대하 31장은 히스기야가 내부적으로 추진한 신앙 개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행정적 노력을 기울인 내용이 나오고, 32장에는 외부적으로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대적으로 유월절을 지킨 후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가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다시 성전에서 섬기게 했어야 했고, 이 일을 위해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다윗-솔로몬 시대처럼 풍성하게 드렸고, 히스기야는 드려진 헌금이 잘 관리되고, 성읍과 주변 들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잘 지급되도록 했습니다.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은 적어도 두 차례에 걸친 새로운 인구 유입으로 다윗-솔로몬 시대보다 3~4배나 확장되었습니다. 산헤립이 쳐들어 왔을 때, 외부의 물근원들을 막고, 특히 기혼 샘물을 실로암 못으로 끌어들이는 대형 지하 수로 공사를 폅니다.1 이 외에도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벽과 망대 수축, 무기 개발 등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산헤립이 턱 밑까지 쳐들어와서 두 차례나 위협했을 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응답을 받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전쟁도 못하고 돌아가게 될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만하게도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내뱉은 산헤립과 그 군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의 공격을 받아 하룻밤새 185,000명이나 몰살 당하고 본국으로 도망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훼방한 산헤립은 나중에 아들들의 칼에 죽고 맙니다.2
32:24-26절 말씀은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15년 삶을 연장시킨 이야기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신바벨론 사신들과의 교류가, 먼저는 교만함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힘을 의지하려 했던 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실제적으로 앗수르의 침공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8/3일 묵상글 참조). 다행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했을 때, 성경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거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라고 적고 있습니다 (32:22). 히스기야는 다윗 왕실 묘에서도 다른 왕들보다 높은 곳에 묻혀 특별한 존대를 받습니다. 부족하나마, 하나님을 귀히 여긴 그가 높임 받는 모습입니다.
1. 히스기야 당시의 예루살렘 (옅은 분홍색 부분이 확장된 지역)
https://creation.com/hezekiah-archaeology-2 자료 편집
2. 히스기야 터널
http://www.romanaqueducts.info/aquasite/jerusalempools/index.html
중앙에 터널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비문에 기록된 것처럼, 양쪽에서 터널을 파들어 중간 지점에서 만났으며, 기혼 샘쪽 높이가 해발 635.66m이고 실로암 못의 높이가 633.92m로 ,1.5m 정도의 높이 차이만 나도록 약 0.6%의 경사로 물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전후 - 남유다 멸망 전후 국제 정세
(참고로, 화살표 방향은 공격/침략을 뜻합니다.)
1.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남하하여 예루살렘에 정착했고, 산헤립이 쳐들어와 예루살렘만 남기고 다 차지했을 때도, 많은 남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이처럼 많은 인구들이 장기간 전쟁에 버텨내려면 충분한 물공급이 필수적이었고, 히스기야는 약 533m 에 달하는 지하수로를 파고, 성밖의 샘물은 보이지 않게 막음으로, 성 안쪽으로만 물이 흘러 들어오게 하여 물을 확보했던 것입니다. (다음 유투브에서, 자세한 설명을 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MH3uJUc1jE)
2. 산헤립은 통치 내내 8번의 전쟁을 치렀는데, 대부분인 앗수르 남쪽의 엘람과 바벨론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고, 셋째 원정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 도시 국가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아스글론이 반앗수르의 선봉에 섰었고, 히스기야도 아하스 때의 친앗수르 정책을 따르다, 마침내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 기록대로, 애굽과 구스 등이 팔레스타인 도시국가들을 도우러 왔지만, 모두 패하고, 예루살렘도 새장에 갇해 새처럼, 넓은 밭의 원두막처럼 단 하나 살아남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적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아와 포위 작전을 쓰기도 전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당시 바벨론 왕이었다 쫓겨난 므로닥발라단의 사주로 다시 바벨론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후 산헤립은 바벨론과 엘람이 연대하여 계속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진압하는 데 힘을 쏟게 되고, 셋째 아들 에살핫돈을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첫째 둘째 왕자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에살핫돈은 681년에 이 사태를 진압하고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